아버님, 아버님이 돌아가신 지 벌써 16년의 하늘이 흐름니다.

칠순의 어머니는 내주 월요일에 있을 당신의 추모를 조용히 준비하시고 

아버님, 저는 오늘 아침 보슬비가 내리는 집근처의 봉제산에 올랐습니다.

간 밤의 폭우로 무게를 이기지 못한 나뭇가지들이 늘어져 있고,

옥죄는 세상으로부터 탈출에 성공한 토끼 한 마리가 

산 안개 사이로 나타나 애저러이 눈빛을 보내고는 사라집니다. 

아버님이 운명하시던 1995년 7월 9일의 저녁엔 무던히도 비가 내렸습니다.

내리는 비는 아버님의 안장(安葬)을 시작하면서 맑게 개더니,

봉(峰)을 쓰고 나서 당신의 옷가지를 말없이 태우던

둘째아들 시인의 부지깽이 위로 다시 내렸습니다.

아버님, 보고 싶습니다. 나는 당신이 무척이도 그리웁습니다.

인생이란 그런 것이어서 당신의 목소리를 이 지상에선 다시 들을 수 없으련만,

7월이 오고 비가 내리면 나는 이렇게 당신이 그리운 것은,

당신은 뒷모습이 아름다운 나의 아버지이기 때문입니다.

산을 내려오니 올 봄에 경비아저씨가 심어 둔 산나리가

주황색 꽃을 예쁘게 피웠습니다.

새벽을 나서 산밭과 골짜기 다랭이논(畓) 물꼬를 보시고는

돌아오는 길 바랭이지게 가득 소꼴을 베어 젖은 손으로 사립문을 열고, 

간혹은 따온 송이버섯을 호박잎에 말아 아궁이 잔불에 맛있게 구워서

눈비비며 일어난 우리들을 먹이셨지요.

아버님, 된장을 푼 호박국에 쌀보리 가득한 아침밥을 얼른 말아드시고는 

또 다시 들판으로 멀어지던 그 날들의 기억이 잊혀지지 않아서, 

저는 당신을 닮은 두 다리로 풀섶을 헤치며 봉제산을 내려왔습니다. 

당신의 피와 살이 흐르는 두 딸과 두 아들 두 며느리가 커다란 부와 권력과 명예를 

안고 사는 건 아니지만, 소박하고 잔잔하게 당신의 못다 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당신의 손주 활, 다인, 황이가 건강하고 지혜롭게 자라고 있습니다.

어쩌면 다툴 일 없는 이 행복을 당신께서 바라시고 기뻐하실 것이라 생각합니다.

아버님 사랑합니다. 그리고 고마웠습니다.

큰아들 성만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