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나의 아내 봉혜와 결혼한 지 23년 되는 날이다.

하나님이 기쁘신지 아침 기온이 따사롭고 하늘이 청명하다.

홀로 봉제산에 올랐다. 산을 오르며 생각해본다. 어찌 23년이 훌쩍 흘렀는가.

하나님께 감사할 따름이다. 나보다 몇 곱절 보살펴야 할 인생들이 많건만

이 못난 나에게 이 만큼의 복을 주시었다.

온 가족이 아픈 데 없이 건강할 수 있었다. 많은 재물이야 아니지만 그래도

남에게 손 벌리며 궁하게 살지 않도록 해주셨다.

짐승 같은 인간들에게 당하지 말고 살라며 세상 지식도 배우게 하셨고,

뭣보다 진리의 하나님을 공경하게 하셨으니 이보다 더한 은혜가 어디 있겠는가.

간혹은 원망하며 불평하는 철없는 나를 하나님은 꾸욱 눈감아 주시었으니,

그렇게 해주지 않으셨다면 나는 꽥소리도 못 지르고 죽었을 것이다.

봉혜와의 23년간에 일들이 많았다. 돌아보니 지긋지긋 징글징글하기까지 하다

그러나 그 어려움들을 하나님이 굽어살펴주시고 내 옆구리에 항상

봉혜를 두시므로 극복할 수 있었다

1985년 여름, 처남을 면회 온 금촌의 5계절다방에서 봉혜를 처음 만나기 전날 밤, 

나는 꿈속에서 봉혜를 보았다. 목 둘레에 둥그런 모양의 흰 꽃무늬 레이스가 달린

분홍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그 꿈 이야기를 오늘도 할까 하는데 봉혜는 필경 들은 척도 안할 것이다.

그런데 그 꿈 이야기는 사실이다. 나는 봉혜한테 거짓말 안 한다.

봉혜는 그때 입었던 분홍 원피스를 지금도 버리지 않고 잘 보관하고 있다.

그러니 나도 봉혜를 잘 대해 주어야 한다.

나와 봉혜는 앞으로 또 살아갈 23년을 꿈꿔 본다. 단순하고 자유롭게 살고 싶다.

그러기 전에 올해의 남은 석달이 중요하다. 왜 중요한지는 우리가족만 안다.

내가 좋아하는 천상병의 시 회상을 돈다발 대신 마음을 실어 봉혜에게 부치나니.

그 길을 다시 가면

봄이 오고,

고개를 넘으면

여름빛 쬐인다.

돌아오는 길에는

가을이 낙엽 흩날리게 하고

겨울은 별 수 없이

함박눈 쏟아진다.

내가 네게 쓴

사랑의 편지.

그 사랑의 글자에는

그러한 뜻이, 큰 강물되어 도도히 흐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