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뜨니 차양 새로 새어드는 햇빛이 밝습니다.

서양자두꽃으로 명명한 태풍 '무이파'의 세력이 예상과는 달리 

깊은 상처였음을 봉제산이 전합니다.

'무이파'는 발해만을 따라 시베리아 북쪽으로 달아났는데

여전히 인천의 날씨는 흐리고 잔바람이 일렁입니다.

이럴 때 나는 어린시절이 생각납니다.

나는 만수동에 사는 어머님을 찾아뵈었습니다.

동네 정육점에서 비계가 섞인 돼지고기 한 근 사들고,

이렇게 비 오는 날, 그 옛날처럼 묵은 김치 - 돼지고기 한 근 풀어

아픈 누이와 함께 펄펄 끓여 맛있게 잡수시라고.

내가 살던 고향은 파도소리 들리는 저 남녘의 마을.

중학교 2학년 때 서울로 이사왔으니 나의 어린시절은 

아름다운 해남이 가꾸어준 선물인 셈입니다.

태백의 끝자락이 여인네 치마자락처럼 나부끼는 달마산을 

바라보며 자랐습니다. 그 달마산은 내가 다닌 현산초등학교의 교가처럼

오색병풍이 굽이쳐 흐르는 듯 멋졌습니다.  

장마철이면 두륜산으로부터 산골로 쏟아지는 물줄기가 장관이었습니다. 

물살은 족히 10만평이 됨직한 탑동저수지를 삽시간에 불어나게 했습니다.

물살이 쿨럭이며 성난 사자와 같이 밀고 당기며 달린다는

사실도 그 때야 알았습니다.

물살에 윗마을 돼지들이 둥둥 떠내려 올 때도 있었습니다. 

때로는 마을사람들이 장마에 시름하는 돼지를 골라

공동으로 고깃거리를 마련했습니다.

새끼줄에 한 두근씩 고기를 꿰어(가을추수에 갚기로 하고)

외상장부를 적고 흩어지던 사람들,

그 날 저녁은 마을도 물살도 조용했습니다.

비가 그치면 물살은 며칠 후 예쁜 조약돌과 발가락이 구별되리만치 투명했습니다.

나의 정강이를 스치며 흘렀습니다. 그렇게 서서 물살을 바라보면

나는 물살의 배를 타고 아래로 아래로 흘러 어디로든

닿을 것 같았습니다.

그 세월을 지나 돼지고기 한 근 받아 든 어머님의 얼굴이 밝습니다.

그 옛날 나의 아버지처럼 새끼줄에 꽤어서 드릴 걸 그랬습니다.

해남군 현산면 안평리의 마을사람들에게도

새끼줄에 돼지고기 한 근씩 보내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