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입니다. 추위를 유난히 타는 터라 군생활을 하면서도 힘들었던 계절입니다.

그 겨울이 이제는 싫지가 않습니다. 겨울은 겨울대로 낭만이 있습니다.

나도 철이 드나 봅니다. 이 겨울 생각나는 추억이 하나 있어 적어두려 합니다.

'시네마코프' 입니다. 무슨 뜻인지 하겠지만 어린시절 영화 이야기입니다.

이맘 때면 농촌 들녘엔 가을걷이를 끝내고 탈곡을 끝낸 볏단이며 수숫단이 즐비하게 서 있습니다.

한갓진 동네 초가지붕은 정갈한 새옷으로 갈아입고, 마을 한가운데를 흐르는 마른 냇가엔

새악시 이마처럼 납작이 썰은 고구마가 겨울볕에 건조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달구지에 영화를 싣고 떠도는 시네마코프가 있었습니다.

내가 살던 고향 해남 현산의 일평리는 커다란 5일장이 서던 곳입니다.

점심 나절에 도착한 시네마코프가 짐을 내린 뒤엔, 관계자들이 동네아이들을 불러모아

나무기둥 홈을 파게 했습니다. 천막을 둘러치기 위한 홈입니다.

추위에 얼은 장터바닥을 50센티는 파내려가는 일인데 아이 한 명에게는

영화표 한 개가 주어졌습니다. 친구들은 저녁밥을 잊고 팠더랬습니다.  

그리고는 연필만한 흑연심이 들어있는 축전지를 여러 겹으로 붙인

나팔꽃 모양의 대형스피커를 메고, 연사를 따라나서는 몇 명의 아이들에게도

영화표가 주어졌습니다.

나는 스피커를 메고 이 마을 저 마을 뒷동산에 따라다니다

해가 진 후에라야 영화표를 한 장 받을 수 있었습니다.

필름이 낡아 대부분의 영화가 흰줄이 비처럼 주룩주룩 내리는 모양으로

(무명천을 배경으로) 흘러갔지만, 그 마저 못보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영화표 값이 흑백은 15원, 총천연색은 25원 정도였는데,

친구들은 영화비 마련을 위해 포스터가 나붙는 날부터 무던히 애를 써댔습니다.

뒤뜰에 달아놓은 마늘 한 접을 몰래 빼내, 점방의 라면 몇 그릇과 영화표로

바꾸는 친구도 더러 있었지요.

새벽 1시가 넘어 영화가 끝나면 칠흙같은 밤에 남포등을 앞세워

여러 갈래의 마을로 흩어지는 광경이며, 왁자지껄한 영화의 뒷이야기가 

산야의 메아리가 되고, 조심조심 마당을 지나 영화처럼 잠이들곤 했습니다.

그 친구들 지금 어디에 어떻게들 살고 있을까요.

보고싶습니다. 그 시절, 그 친구들.  연날리며 시네마코프 총천연색 영화를

함께 고대하던 성희, 종수, 경환, 용화, 찬진, 차표집 가시내 찬옥.

아~ 그 이름 그 얼굴들.